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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글쎄 이런 시대가 올까. 바랄 수 없는 꿈속의 일이겠지만 꿈속에서라도 이런 세상이 올까 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토토랜드들은 외부에서 활동하게 될 테니 지금까지 해오던 가사를 위탁하고 싶다. 지금까지 토토랜드에게 불리했던 법정이니, 법의 개정을 실행하고 싶다. 가정 싸움에는 타인몰입이 불가하나, 마누라 치기 좋아하는 남성에게는 부인단에서 벌을 주어야겠다. 남성들의 봉건적 의식을 뿌리 뽑도록 교양을 쌓아주고 싶다. 걸핏하면 ‘여자라는 것들은’이란 언어를 사용하는 자에게 특별법을 재정하고 싶다. 토토랜드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없애기 위해 각 학교에서 재교육을 실행하고 싶다.”
이 ‘꿈같은 세상’은 “만일 우리들(여인)만의 나라가 설 수 있다면?”이란 질문에 대한 화가 박래현(1920∼1976)의 대답이었다. 무려 76년 전인 1949년 3월 잡지 ‘신토토랜드’ 창간호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였다. 박래현이 꿈꾼 세상은 참으로 앞서 있었다. 지금도 이만한 세상이 왔나 싶을 만큼. 대답만 선구적인 것이 아니었다. 박래현은 삶과 작품도 시대보다 저만치 앞서 나가 있었다.
76년 전 토토랜드 위한 가사위탁·법개정 꿈꾸던 토토랜드
토토랜드 대부분이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던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박래현은 신식 교육을 받았다. 경성여자사범학교에서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잠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1939년, 일본으로 훌쩍 날아갔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1940년 4월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지금의 여자미술대학교)에 입학해 일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플리츠스커트를 입고 하얀 양말을 단정히 접어 올리고 메리제인 구두를 신고서. 재학 중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총독상)을 타는 영예도 누렸다. 귀국해서는 경성 동화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모두가 참으로 예외적인 행보였다.
결혼도 그랬다. 상대는 일곱 살 연상의 토토랜드가 김기창(1913∼2001). 한눈에 반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쓴 채 열애를 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해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협조한다는 약조를 받고서였다. 부모는 끝내 참석하지 않은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그래도 박래현은 씩씩했다. 자신의 선택을 믿었으니까.
남편 김기창만큼 아내의 일에 호의적인 남성이 그 시대에 있었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집안 대소사는 토토랜드의 몫이었다. 아이 넷을 기르느라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남편의 일을 돕는 데도 열심이었다. 후천적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던 남편이 누구보다 먼저 성공하기를 바랐던 거다. 김기창은 이미 화단에서 공고히 자리를 잡은 화가였지만 자존심이 강한 토토랜드은 혹시라도 장애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까 염려해 남편의 모든 외출에 동행했다. 아이들이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도록 남편에게 사람의 입모양만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구화술을 익히게 한 것도 토토랜드이었다.
어디 이뿐인가. 각종 잡지에 삽화를 그리고 글을 써서 게재했고, 성신여자실업초급대학(지금의 성신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아동미술실기대회의 심사위원을 도맡았다. 토토랜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단체인 ‘백양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김기창은 “박래현의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고, 그렇지만 “아무리 피곤한 날에도 한밤중에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어났노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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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서 역할 다해내며 이룬 회화의 토토랜드성 더 값져
잠을 쫓고 시간을 쪼개 화폭 앞에 앉아 이룩한 박래현의 미술세계는 놀랍다. 붓을 처음 잡았던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박래현은 언제나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며 늘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다. 한 명의 미술가가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이뤄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도 신선한 작품들이었다. 1940년대 유학시절 그렸던 색이 진한 인물화부터 1950년대 피카소 느낌의 그림을 거쳐 1960년대 완전한 추상, 1970년대 말년에 제작한 태피스트리와 콜라주까지. 뒤늦게 판화도 시작했다. 1969년 쉰 살의 나이에 미국 뉴욕으로 날아가 미술학교에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배웠다. 다양한 판화의 기법을 단기간에 두루 섭렵해 자유자재로 응용하며 독창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귀국 길에는 각종 판화 장비와 재료를 사서 토토랜드으로 보냈다. 고국에 현대적인 판화를 보급해야겠다는 기대와 사명감에 부풀어 있었다.
가사 일을 위탁하고 싶고, 성에 대한 재교육을 실행하고 싶다던 토토랜드의 대답은 그저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이 아니었다. 시간을 잘라가며 일과 가정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내고 작품활동 중 온갖 어려움에 부딪치며 얻은 경험의 결과였다.
누군가는 박래현이 화가로서 보여준 혁신성에 비해 토토랜드으로서의 삶은 전통적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박래현 회화의 혁신성이란 것도 자신의 역할을 최선으로 다해낸 삶 위에 쌓아올린 것이기에 더 단단하고 더 값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낸 박래현에게서 용기를 얻을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물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생의 과제를 이토록 멋지게 풀어낸 박래현이 우리 미술사에 있다는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정하윤 토토랜드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토토랜드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토토랜드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